삶을 기록처럼

내가 나를 꺼내러 간 여행, 그 시작의 조각 (1편)

편인文山 2025. 5. 1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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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여행을 시작하기 전과 그 이후 -  “내가 나를 꺼내러 간 여행, 그 시작의 조각”

 

스무 살의 나는 한참을 무너져 있었다.
무언가를 끌어안기보다는, 내려놓고 싶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떠났다. 어디라도 좋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

 

- 내 삶은 두 갈래로 나뉜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과 그 이후로 -

 

 

“그냥 해보고 싶어서 했다”

2005년의 인천공항.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미쳤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정답이 없다는 말 같아서, 틀려도 된다는 말 같아서.

항공권은 직항이 아닌 홍콩 경유였다.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낯선 풍경들이 마치 나를 바라보는 시선 같았다.
어색하고, 두렵고, 그래서 더 설레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홍콩에서 환승 게이트가 바뀌었다.
영어도 서툴렀고,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의 손짓을 외면했고, 어떤 이들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청소를 하시던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길을 안내해 주셨다.
그 순간, 나는 배웠다.
‘겉으로 번드르르한 것은 속을 보장하지 않는다.’
내가 의지하려 했던 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나를 도와준 건 ‘묵묵히 일하던 사람’이었다.

 

 

“보라카이, 그 이름의 잔상”

우여곡절 끝에 마닐라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낯설고, 외롭고, 불편했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 하숙집을 소개해줬지만,
집은 열악했고, 비용은 비쌌다.

서둘러 보라카이로 떠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해외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ANO, 기억 속 이름 하나”

보라카이 공항에서 멍하니 서 있던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러 마닐라에서 왔다는 필리핀 사람, ANO.
함께 숙소를 찾고, 바다를 보고, 음식을 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고, 낯선 곳에서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친절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좋은 사람 앞에서 내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반복되는 나의 못난 습관이다.

 

마무리

여행의 첫날들.
그 시간들은 실패투성이었고,
낯설었고,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순간들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순간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건 분명, 내가 나를 꺼내러 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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